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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래드씨 김중섭 셰프
   비앤씨월드 2015.07.28 Am09:09, 조회 : 22,723  
브래드씨 김중섭 셰프
끝까지 움켜쥐었던 희망

15여 년 전 추운 겨울, 20대 청년은 여행가방 하나와 현금 3만원을 들고 거제도에서 서울로 올라온다. ‘지금은 보잘것없지만 언젠가 나만의 가게를 꼭 열겠다’는 단단한 꿈을 꾸면서. 겨울 파카를 여미며 잠실의 한 제과점으로 들어갔던 그는 훗날 아내의 손을 잡고서 꿈에 그리던 가게를 열고 만다. 생의 절정을 향해 달리는 브래드씨 김중섭 셰프의 이야기다.

취재‧글 구명주 사진 이재희

프랜차이즈 빵집을 벌벌 떨게 했던 대흥동 아비앙또 베이커리. 김중섭 셰프는 쓰러져 가는 아비앙또를 인수해 동네 주민들이 아끼는 빵집으로 성장시킨 사람이다. 하지만 2015년 지금, 아비앙또는 사라지고 없다. 그가 돌연 빵집을 접은 건 프랜차이즈 빵집의 공세가 무서워서도, 제빵에 질려서도 아니었다. 생각하지도 못했던 불운이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고통스러운 터널을 통과한 지금, 그에겐 한 줄기 빛이 보인다. 김중섭 셰프는 두 번째 그의 빵집에서 재도약하는 중이다.

가진 것 없던 20대 청년의 상경
김중섭 셰프가 제빵사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건 군대에 복무하던 무렵이었다. “평범하게 대학을 다니다가 군대에 갔는데, 제대할 때가 되니까 뭘 먹고 살아야 하나 고민이 들더군요. 불현듯 생각난 게 제빵이었어요. 어머니가 빵을 좋아하셔서 어릴 때부터 집에는 빵이 가득했거든요. 익숙한 음식이라 그런지 내가 직접 만들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막연히 계획만 세우던 그에게 때마침 같은 부대의 소위가 ‘잠실에서 제빵사로 일하는 친구를 소개해주겠노라’며 손을 내밀었다. 소위의 도움으로 그는 르네상스 제과점에서 빵을 배우기 시작한다. 새벽 6시부터 밤 10시까지 일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오로지 공장에 갇혀 살았기에 서울은 마치 태양이 사라진 암흑의 도시처럼 느껴졌다. 갑갑한 마음이 들 때마다 그는 ‘기술’을 쌓고 ‘돈’을 모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이를 악물었다.
기술을 배우는 건 책을 읽는 것과 같았다. 여러 권의 책을 속독할 수도 있지만, 그는 한 권의 책을 찬찬히 정독하고 싶었다. “저는 기술을 제대로 배우기 위해선 한 기술자 밑에서 오랫동안 일을 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업장을 이유 없이 옮겨 다니고 싶진 않았어요. 르네상스를 떠난 것도 공장장님의 기술을 더 배우고자 공장장님을 따라 나간 거였죠”

오랫동안 바라온 오너셰프가 되다
묵묵히 기술을 배우던 그는 봉천동 빵굼터에서 비로소 공장장이 된다. 직책은 공장장이었지만 그에게 직책은 중요하지 않았다. 빵을 배우던 초창기나 공장장이 됐을 때나 그는 오직 하나만 생각했다. 미래의 가게를 위해 언제 어디에서 일하든 내가 바로 ‘사장’이라고. “사장님을 대신해 자발적으로 가게를 본 적도 많아요. 왜냐면 나중에 가게를 차렸을 때를 대비해 연습한 거죠. 손님을 응대하는 방법, 매출을 올리는 방법 등을 연구하면서요”
그러던 어느 날, 빵굼터는 돌연 문을 닫는다. 정확히 말하면 빵집의 신분이 바뀌었다. “프랜차이즈 빵집이 무섭게 생겨나던 때였는데, 사장님이 위기의식을 크게 느꼈어요. 자진해서 빵굼터 간판을 내리고, 대형 프랜차이즈 빵집의 가맹점으로 등록했더군요” 본사로부터 빵을 공급받는 프랜차이즈 빵집의 시스템 아래서 기술자의 존재는 무의미했다. 김 셰프는 그 길로 빵굼터를 나와 사당의 프랑소와 베이커리에 공장장으로 들어간다. 그때도 역시나 ‘창업을 하고 싶다’는 욕구는 잦아들지 않았다. 결국 프랑소와로 이직한 지 1년 뒤, 그는 자신의 가게를 대흥역 인근에 오픈한다. 그동안 월급의 90%를 저축하면서 창업 자금을 모아온 그였다.
김중섭 셰프가 가게를 차린 곳에는 이미 남루한 빵집 하나가 오래전부터 터를 잡고 있었다. 빵집의 이름은 아비앙또 베이커리. 하루 매출이 20만원도 채 되지 않던 그야말로 ‘쓰러져 가는’ 동네빵집이었다. 그러나 대흥역 바로 앞이라는 가게의 입지가 마음에 들었고, ‘내 기술로 가게를 살릴 수 있다’는 자신감도 가득했다. 그렇게 그는 허름한 가게를 그대로 인수받아 장사를 시작한다. 아비앙또라는 가게의 이름도, 낡은 인테리어도 하나도 바꾸지 않은 채 말이다. 그가 유일하게 손을 댄 것은 아비앙또의 제품이었다. “도넛만 겨우 튀겨서 파던 작은 빵집이었어요. 제가 가게를 넘겨받은 뒤에는 대대적으로 제품을 정비했습니다” 또한 그는 서강대학교와 가깝다는 점, 대가족이 많이 살고있다는 점 등 상권의 특성을 잘 포착했다. 학생 손님을 잡으려고 일부러 창가에는 예쁜 타르트를 진열하고, 매장 안에는 온 가족이 함께 먹기 좋은 기본적인 빵을 대대적으로 깔았다. 6개월이 지나니 매출이 5배 뛰었다.

프랜차이즈 골리앗과 치열하게 맞서다  
빠른 승진, 꿈에 그리던 창업 등 바라는 대로 뭐든지 이뤄지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삶이란 녀석은 역시나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평탄하기만 했던 삶에 울퉁불퉁한 굴곡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프랜차이즈 빵집의 영업사원이 그를 찾아온 건 불행의 전조였다. 2007년경 전국의 동네빵집들이 프랜차이즈 빵집의 사세 확장에 하나둘 문을 닫는 상황이었고, 아비앙또 또한 안전하진 못했다. “조만간 아비앙또 주변에 프랜차이즈 빵집을 개설할 예정이니, 가맹점주가 되라고 설득하더군요. 제가 왜 가맹점주가 됩니까? 제 기술과 노하우가 있는데요” 화를 내면서 영업사원을 쫓아냈지만, 프랜차이즈 빵집의 공격은 집요했다. 협박과 회유가 이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게 바로 옆에 프랜차이즈 빵집이 갑자기 문을 열었다. 2층짜리 건물을 통째로 사용하는 베이커리 카페였다. 허름한 동네빵집과 으리으리한 프랜차이즈 빵집이 나란히 들어선 그 모습은 제과업계의 슬픈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촌극 같았다.  
‘얼마 못 가 망할 것’이라는 주변의 걱정이 쏟아졌다. 그러나 ‘어디 한번 해보자’ 하는 오기가 샘솟았다. 김중섭 셰프는 프랜차이즈 빵집이 프로모션을 벌일 것 같으면 사은품을 먼저 제공하는 식으로 방어막을 세우고, 더 좋은 신제품으로 먼저 공격하기도 했다. 그렇게 치열하게 싸우는 사이 첫 번째 가맹점주가 떠나고, 두 번째, 세 번째……. 2007년부터 2012년까지 가게를 하는 동안 무려 일곱 명의 가맹점주가 바뀌었다. “프랜차이즈 빵집을 무너뜨리고 말겠다는 생각으로 수년간 싸웠는데, 나중에는 내가 누구와 싸우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맹점주들이 망해서 나가는 동안에도 프랜차이즈 빵집은 그 자리 그대로였으니까요. 가맹점주들도 저와 다를 바가 없다는 측은한 마음도 커졌고요”
회의감이 찾아오던 그때 인생의 최대 고비가 찾아온다. 영등포의 한 병원에서 관절 주사를 맞은 아내가 의료사고를 당한 것. 침대생활을 하게 된 아내를 간호하기 위해선 가게 문을 닫아야만 했다. 명절을 제외하곤 하루도 쉬는 날 없이 빵을 만들고 팔아온 시간이 허무하게만 느껴졌다.

초콜릿 공예에 눈을 뜨다
그러나 김중섭 셰프는 좌절하지 않았다. 아내를 간호하는 가운데, 제빵사를 찾는 곳이 있으면 달려가 아르바이트로 일하는 등 도약의 발판을 찾았다. 제과기능장에 도전한 것도 이맘때다. 한미제과제빵학원에서 기능장 공부를 한 그는 한 번에 제과기능장에 합격했고, 음식문화교류협회가 발급하는 초콜릿 마스터 자격증, 케이크 디자인 자격증 등까지 취득하고 만다. 그의 자격증은 빵집을 잃고 기술을 잊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 자국이었다.
“제과기능장이 되고 보니, 나만의 특기가 뭘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빵이나 과자는 기능장이라면 누구나 기본적으로 만들 수 있잖아요. 그래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 초콜릿입니다“ 일단 그는 2013년 서울국제빵과자경진대회(SIBA)의 초콜릿 대형공예를 준비하기 시작한다. 작업장이 마땅하지 않았기에 천안의 한미제과제빵학원까지 달려가 초콜릿 공예를 연습했다. 처음 대회에 출전한 결과, 초콜릿 대형공예 부문에서 금상을 차지했다. “초콜릿 공예에서 중요한 건 무게 중심이에요. 자칫 잘못하면 무너질 수 있거든요. 그동안 초콜릿이라 하면, 몰드에 넣고 굳히는 게 끝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는데 공예를 하면서 초콜릿의 세계가 얼마나 다채로운지 뒤늦게 깨달았죠“
다음 해 그는 또다시 SIBA 초콜릿 대형공예 부문에 도전했다. 게다가 더 큰 기회까지 찾아왔다. 월드 초콜릿 마스터즈 한국대표 선발전에 참가하게 된 것. 선뜻 작업장을 내준 강서제과제빵학원 덕분에 셰프는 장소를 걱정하지 않고 초콜릿 공예에 무섭게 매달릴 수 있었다. 두 번째 대회에 나간 결과 초콜릿 대형공예 부문에서 대상을 타고, 한국대표 선발전에서는 3위에 올랐다. 빵집을 접으며 추락했던 자신감이 마음 가장 깊은 곳을 치고서 다시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국가대표 선발전은 라이브로 진행되거든요. 현장에서 사람들이 다 보는 가운데 초콜릿 공예를 해보니 참 좋더라고요. 짜릿하고, 재밌고. 돈벌이는 제쳐놓고 초콜릿 공예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죠”
대회에 출전하며 자신감을 회복한 덕분에 김중섭 세프는 올해 초 신림동에 새로운 가게를 열었다. 가게 이름을 브래드씨로 새로 짓고, 첫 가게를 낼 때는 엄두도 못 냈던 인테리어에도 신경을 썼다. 매장의 몇몇 가구는 그가 직접 설계해 주문 제작한 것이다. 의료 사고 이후 누워 지내던 아내도 이제는 세상 밖으로 나왔다. 아직까지 완치된 건 아니지만, 세상 그 누구보다 밝게 웃는 그의 아내는 셰프에게 항상 힘을 실어준다. “브래드씨를 아비앙또 만큼 사랑받는 빵집으로 만들고 싶고,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월드 초콜릿 마스터즈의 한국대표가 되고도 싶어요”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을 만큼 절망스러웠던 나날을 의연하게 뛰어넘은 김중섭 셰프. 그는 온몸으로 희망을 노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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